지난 1년간 규정 위반 43만여건 달해 잇단 기내 화재와 처벌 공백, 그리고 상상력의 실패
추석 연휴인 9월 24일, 인천공항에서 다낭으로 출발하려던 여객기의 승객 가방에서 불이 났다. 발화 원인은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리튬 배터리가 연기를 뿜는 일이 더는 드문 뉴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올해만 해도 1월 중국 싼야에서 청주로 오던 항공기에서 가방 속 보조배터리 연기로 승무원 3명이 병원에 실려갔고, 7월에는 인천을 떠나 필리핀 칼리보로 가던 항공기에서 이륙 직후 불꽃이 튀었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이 확인한 항공기 리튬 배터리 연기·화재·과열 사건은 2024년 89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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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배터리가 위험한 이유는 ‘열폭주’ 때문이다. 충격이나 내부 결함으로 합선이 일어나면 온도가 순식간에 치솟고 인접한 셀로 불이 번진다. 불꽃을 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머리 위 선반이나 가방 속에서 시작된 불은 연기가 새어나올 때까지 알아채기 어렵다. 2025년 1월 김해공항에서 기체가 전소된 에어부산 여객기도 선반 속 보조배터리가 발화 원인으로 추정됐다.
규정은 세계 기준을 이끌었지만,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다
우리 정부의 대응은 빨랐다. 선반 보관 금지와 단자 절연을 도입했고, 우리나라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제안한 강화안은 올해 3월 ICAO 이사회 승인을 거쳐 국제기준이 됐다. 4월 20일부터 승객 1인당 보조배터리는 2개까지만 휴대할 수 있고, 기내에서 사용하거나 충전할 수 없다. 100Wh 초과 160Wh 이하 제품은 항공사 승인이 필요하다.
문제는 현장의 실효성이다. 2025년 3월부터 1년간 국내 공항 보안검색에서 적발된 보조배터리 규정 위반은 43만 3051건으로, 출발편 한 편당 한 건꼴이다. 이 중 80.6%는 위탁수하물에 넣었다가 적발된 경우다. 대부분 규정을 몰라서 생긴 일이겠지만, 이 숫자는 규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어겨도 실질적인 불이익이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현행 항공안전법은 안내를 소홀히 한 항공사에 과징금을 물릴 뿐, 규정을 위반한 승객 본인을 제재할 근거가 없다. 기내에서 몰래 충전하다 들켜도 승무원이 제지하는 것이 전부다. 국토교통부가 추진 중인 승객 과태료 도입은 아직 법제화 초안 단계에 머물러 있다.
중국의 엄격한 잣대, 우리는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지난 3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 보안검색에서 한국의 KC 인증을 받은 보조배터리를 압수당해 현장에서 폐기했다. ‘중국 안전인증’(3C) 표시가 없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흔히 중국산 제품을 낮춰 보지만, 정작 중국은 자국 인증을 거치지 않은 배터리를 검색대에서 철저히 걸러내고 있었다. 중국 민항국은 2025년 6월부터 자국 국내선에서 3C 표시가 없거나 흐린 제품, 리콜 대상 보조배터리의 반입을 금지했고, 공항에 자진 폐기·임시 보관 구역과 충전시설을 늘렸다.
이 제도를 그대로 들여오자는 것은 아니다. 인증 표시가 안전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도 물어야 한다. 승객이 들고 타는 수많은 배터리가 리콜 제품인지, 부풀거나 파손된 불량품인지 무엇으로 확인하고 있는가.
흔한 물건일수록 위협을 상상하기 어렵다
항공보안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필자가 더 우려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악용의 가능성이다. 일상의 전자기기를 테러에 쓴 전례는 이미 있다. 2016년 소말리아 달로항공 여객기에서는 노트북에 숨긴 폭발물이 터져 동체에 구멍이 났고, 공항 직원의 연루가 드러났다. 이듬해 미국과 영국은 전자기기에 폭발물을 숨길 수 있다는 위협 정보에 따라 일부 중동 노선의 대형 전자기기 기내 반입을 금지했다.
올해 9·11 테러 25주년을 맞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공개한 대통령일일보고 71건은 이 교훈을 다시 일깨운다. 그중 1998년 9월 10일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서에는 이미 “폭발물을 실은 항공기를 미국 도시로 몰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경고의 조각은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실제 공격의 모습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9·11 위원회가 가장 중요한 실패로 ‘상상력의 실패’를 꼽은 이유다.
보조배터리도 다르지 않다. 모든 승객이 들고 타는 흔한 물건이기에 연기가 나도 대수롭지 않은 사고로 여기기 쉽다. 누군가 고의로 열폭주를 일으켜 객실 혼란이나 비상착륙을 노린다면 사고와 범죄를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필자가 확인한 공개 자료에서 이런 방식의 여객기 공격 사례는 없다. 그러나 사례가 없다는 것이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기내에서 불이 나면 초기 진압과 인명 보호가 먼저지만, 착륙 뒤에는 현장 증거를 보존해 고의성 여부까지 가릴 수 있어야 한다.
규정을 행동으로 바꾸는 네 가지 과제
첫째, 위반 승객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과태료를 조속히 신설하되 단순 착오와 반복 위반, 기내 몰래 충전을 구분해 무겁게 차등 적용하자. 회항을 부른 위반에는 비용 배상 책임을, 배터리를 이용한 고의적 위해 시도에는 항공보안법상 형사처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안내가 실제로 승객에게 닿게 해야 한다. 한국공항공사 관할 공항 이용객의 약 80%는 모바일·셀프체크인을 이용해 카운터 안내를 거치지 않는다. 예약부터 탑승까지 같은 문구로 경고하고, 셀프체크인 화면에서는 규정을 확인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자. 백 마디 말보다 실제 기내 화재 영상 한 편이 더 강한 경각심을 준다.
셋째, 보안검색의 눈을 넓혀야 한다. 보조배터리는 항공안전법상 위험물로, 보안검색이 찾는 위해물품은 아니다. 그러나 검색대는 모든 승객의 배터리가 반드시 지나가는 관문이다. 검색요원이 부풀거나 파손된 배터리, 개조가 의심되는 제품을 발견하면 항공사에 안전하게 인계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교육해야 한다. 현장 검색으로 배터리 내부 결함까지 판정하라는 뜻은 아니다.
넷째, 객실 대응과 사고 기록을 함께 강화하자. 발열·연기 신고부터 격리보관백 사용과 냉각까지 실전 같은 승무원 훈련을 정례화하고, 발화 물품의 상태, 발견 위치, 승객 진술, 승무원 조치, 착륙 후 인계 사항을 표준 양식으로 남겨야 한다. 이 기록이 원인 규명과 교육, 고의성 판단의 근거가 된다.
우리나라는 보조배터리 국제기준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제 그 기준이 예약 화면과 보안검색대, 객실 안에서 지켜지도록 만드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 승객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안내를, 현장 직원에게는 실행 가능한 절차를, 위반에는 분명한 책임을, 고의적 위해에는 단호한 대응을 마련해야 한다. 9·11이 남긴 교훈처럼, 치명적인 위협은 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평범한 곳에서 찾아온다. 보조배터리 하나를 가볍게 보지 않는 것, 그것이 기내 안전의 출발점이다. ![▲박재완 대한민국항공보안협회 회장 [출처: 본인 제공]](https://cdn.boannews.com/news/photo/202609/146043_128110_3724.png)
▲박재완 대한민국항공보안협회 회장 [출처: 본인 제공]
[글_박재완 대한민국항공보안협회 회장]
지난 34년간 국가정보원에 몸담으며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주인도네시아·캄보디아·아프가니스탄 대한민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했다. 현재 대한민국항공보안협회 제6대 회장으로 항공보안 교육과 정책 제언에 힘쓰고 있다.
출처 : 보안뉴스(https://www.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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