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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이 아빠를 만든다 07] 너희들 앞의 길목마다 천적이 있기를 2023.06.16

정보보안은 의외로 산 지식을 다루는 분야라, 그 안에서 발굴되고 전파되는 중요한 원리와 실천 사항들은 사이버 공간에서만 가치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실생활에서도 보안의 메시지들은 빛을 발합니다. 그것을 아빠의 관점에서 연재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2~3주에 한 번 24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요즘 너희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빠 어렸을 때는 ‘자연’이라는 것이 있었어. 학년이 올라가면서 ‘생물’로 바뀌었지. 그리고 자연이었을 때였는지 생물이었을 때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천적이라는 개념을 배우게 돼. 너희들도 곧 배우거나 얼마 전에 배웠을 거야. 하늘이 정해준 적, 혹은 천 번을 마추쳐도 천 번 모두 싸우게 되는 적이 천적이야. 쥐 입장에서는 고양이가, 고양이 입장에서는 개가 천적이지.

[이미지 = gettyimagesbank]


그러고 보니 아빠가 어렸을 때, 자연이 아직 생물로 변하기 전에, 학교에 천적이 한 명 있었다는 게 기억난다. 매일 치고받고 싸웠던 녀석이었어. 평소에 얌전했는데 아빠만 보면 그렇게 먼저 주먹을 휘두르더라.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어. 그 녀석이 날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거든. 아빠도 걔가 그렇게 막 싫고 그러진 않았어. 돌이켜 보면 그 아이는 아빠의 어떤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나름의 실험을 반복했던 것 같아.

그 당시 같은 반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싸움 실력 순위가 대단히 중요했었어. 물론 상위권에 있는 아이들만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학년 초마다 그 질서가 한 번쯤은 정립되어야 했지. 아빠는 별로 그런 쪽으로 소질이 없었고 관심만 있었는데, 아빠의 천적과 같은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던 해에 같은 동네 살던 한 힘 센 친구가 아빠랑 자기랑 싸우면 비슷하다는 소문을 낸 거야. 그래서 아빠는 순식간에 순위가 올라갔어. 싸움 한 번 안 해 보고, 시비 한 번 안 붙어보고. 왜 걔가 그런 말을 한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어.

한 번 정해진 질서는 잘 깨지지 않아. 그래서 아빠는 그 해 내내 힘 센 친구로서 지낼 수 있었어. (그래 봐야 축구할 때 패스 몇 번 더 받는, 그런 특권을 누리는 것 뿐이었지만.) 그런데 그 천적 친구는 아무래도 이상했나봐. 아무리 봐도 약골 같고, 아주 가끔 컨디션 좋은 날에나 겨우 평범하게 보이는 녀석이 싸움을 잘 한다니 괴리감이 느꼈졌겠지. 아빠의 순위가 믿을만 한 것인가 아닌가 꾸준히 건드려본 거 같아. 아빠가 정말로 숨은 고수였다면 쌍코피 터질 수도 있었는데 자기 안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그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지. 그러게, 어른이 돼서 생각해 보니 꽤나 용감한 녀석이었네.

그 녀석의 실험 정신 때문에 아빠는 매일 맞을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갔어. 칠판에 적힌 선생님 글을 필기하다가 갑자기 아빠 얼굴이 팩 돌아가면 그 놈이 때린 거였어. 방과 후에 청소하다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면 그 녀석이 뒤에서 날라차기를 한 거였어. 물론 아빠도 대응을 했고, 둘은 매번 결판을 못 낸 채 엉겨붙어 있다가 꼭 선생님한테 걸려서 벌을 섰어. 그 놈은 실험을 해봐야 했을 거고, 아빠는 엉겁결에 얻은 그 높은 순위를 유지해야 했어서, 그리고 둘 다 주먹이 솜방망이 수준이라서, 학년이 바뀔 때까지 아웅다웅했지. 그렇게나 싸웠는데 둘 다 얼굴 한 번 붓질 않았다는 게 참 웃기지.

그러는 동안 그 아이는 궁금증이 해결됐을까. 지금에 와서 아빠가 도리어 궁금해진다. 싸움의 순위라는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빠의 정체를 간파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니, 어쩌면 그 녀석 스스로도 그리 잘 싸우는 녀석이 아니었어서 끝끝내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럼 아빠는 그 요행수 같았던 순위를 잘 지켜냈을까? 어, 사실 그랬어. 그 녀석의 시비는 항상 아빠에게 있어 방어전 같은 거였어. 저렇게 맨날 주구장창 싸우기만 하는 놈, 이라는 인상을 다른 친구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지. 실제로 마흔 넘어 그 때 동창들을 만났을 때(천적 그 놈은 연락이 안 됐어), 아빠를 ‘성격 더러운 놈’으로 기억하더라. 그 천적 녀석과 함께 묶어서.

다음 해부터 아빠는 다시 순위와 별 상관없는 평범한 학생으로 복귀했지만 그 1년을 지독하게 방어하며 버틴 후라서 그런지 그 순위권 아이들의 세계에 아무런 관심이 가지 않더라. 그런 쪽 아이들이든 아빠처럼 평범한 아이들이든 다 똑같아 보였고 그렇게 대할 수 있었어. 힘 센 녀석에게는 조금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든지, 평범한 아이들에게는 편하게 대한다든지, 그런 계산을 안 해게 되었어. 힘 세다는 순위 속에 얼떨결에 들어갔던 그 1년보다, 그 순위라는 게 아예 고려 대상도 되지 않았던 다음 해가 훨씬 마음 편하고 즐거웠어. 천적 덕분에 싸움 실력이 강화된 건 아니었지만, 뭔가 나라는 사람 자체가 조금 더 굳건해졌달까. 10대 아이들 솜방망이 다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치?

아빠가 이 얘기를 하는 건, 너희들도 자라면서 분명히 천적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야. 아빠가 만나는 보안 전문가들도 전부 천적이 있어. 바로 해커라고 하는 범죄자들이야. 이 해커란 사람들은 보안 전문가들이 헤아릴 수 없는 밤을 새가며 연구한 방어의 기술들을 기필코 뚫어내는 자들이야. 먼 옛날 순위만 높던 아빠처럼 건드리면 이길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것인지, 자꾸만 이리 치고 저리 쳐 보는 자들이지. 보안 담당자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면서, 보안 담당자들이 매일 출근하면서 얻어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게 하는 게 바로 이 해커들이야.

그런데 이 해커들은 보안 담당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이기도 해. 보안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보안 전문가들이 잘 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원래 사람 눈에 잘 보이지 않는데, 이 해커들이 있기 때문에 겨우 보이거든. 눈에 보이지 않는 보안이라 기업들이 보안 강화에 돈을 잘 쓰지 않는데, 해커들이 한 번 그 기업을 메뚜기떼처럼 훑고 지나가면 돈 좀 아끼라고 해도 보안에 돈을 쓰기 시작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소를 좀 더 빨리 잃게 해 줘서 외양간 고치는 시기를 앞당기는 게 바로 해커들이야. 무엇보다 이 해커들을 앞지르려는 노력 중에 보안의 기술이 발전하기도 하지. 필요하지만 소중하지는 않은,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어.

너희들의 삶이 순탄하기를 아빠로서 바라지만 천적이 하나도 없기를 기도하지는 않는단다. 천적을 만나 고생을 했을 때에야 강해지고 성장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거든. 안전하고 순적한 삶이라는 건 너희들이 배울 걸 놓치지 않고 배우고 경험할 걸 온전히 경험해 지혜롭고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지, 그 자체로 우리가 좇아야 할 결과물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어차피 ‘평화로운 삶을 산다’는 모호한 것이 목적이 되면 추구할 때 힘들어. 하늘이 허락한 적을 맞닥트려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구체적인 목적이 되니까 추구할 때도 어렵지 않고, 그러면서 그 부산물인 순탄한 생활도 얻게 돼.

때마다 극복할 만한 천적을 만난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겠다. 그러니 뭔가 어려워질 때마다 환호를 지르렴. 지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하는 선물 상자가 열리고, 나중에 쓸 수 있는 순탄한 하루가 적립되는 것이니까.

-6월 16일, 아빠가-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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