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안이 아빠를 만든다 08] 어쩌면 인증과 관련된 이야기 | 2023.07.07 |
정보보안은 의외로 산 지식을 다루는 분야라, 그 안에서 발굴되고 전파되는 중요한 원리와 실천 사항들은 사이버 공간에서만 가치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실생활에서도 보안의 메시지들은 빛을 발합니다. 그것을 아빠의 관점에서 연재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2~3주에 한 번 24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요즘 아빠 따라서 시청 같은 데 몇 번 왔다갔다 하더니 너희들 어른들이 하는 서명이라는 것에 관심이 생겼더라. 언젠가는 너희들도 필요할 테니까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너희들이 자라나 어른이 됐을 때면 또 다른 인증 수단이 유행하고 있으려나. 아빠 어렸을 때 어른들 쓰던 도장이 지금은 대부분 서명으로 대체된 것처럼 말야. 너희들은 아마 본 적도 없는 물건이겠지. ![]() [이미지 = gettyimagesbank] 그 때는 어른들 열쇠 꾸러미에 도장이 달려 있기도 했고, 손지갑 안에 도장이 들어 있기도 했어. 장농 깊은 곳에 도장 전용 지갑에 담겨 꼭꼭 숨겨두기도 했었고. 바깥 활동이 많으신 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도장을 찍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늘 지참하는 게 중요했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관했어야 하는 게 도장이었어. 너희 친할머니처럼 집에 주로 계시던 분들은 도둑놈만 조심하면 됐으니까 아빠도 모르고 할아버지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셨다가 가끔 은행에 갈 때나 가지고 나가셨지. 너희가 아빠한테 서명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아빠도 그 소중하고 멋진 도장이 하나 가지고 싶었어. 내 이름 새겨진,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도장. 짙은 색 나무로 된 것을 가지리라. 도장 지갑도 검은 색으로 맞춰서 멋을 내리라. 어른들이 도장을 찍는 걸 볼 때마다 생각했어. 그리고 청년이 되고 처음 은행 통장이라는 걸 아빠 이름으로 만들던 날 도장을 선물 받았지. 정말로 아빠가 바랐던 짙은 색 나무 조각이었어. 그런데 도장을 처음 받는 순간 아빠 마음 속의 외침은 ‘와, 짙고 멋진 도장이다!’가 아니었어. 의외로 ‘나도 이제 어른이다!’였지. 순식간에 지나간 소리라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 때를 떠올려보니 아빠가 그랬더라. 그리고 다시 그 시대를 되돌려보니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도장을 파서 선물을 준다는 건 일종의 성년의식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했어. ‘너도 이제 부모 이름이라는 우산 아래서 나와 스스로의 이름을 낯선 이들에게 확인시켜야 한다’라는 뜻이었던 거지. 생애 최초의 인증 수단이 주어진 날, 아빠는 공식적으로는 어른이 됐다. 도장 받았을 때의 아빠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나를 세상에 인증할 일이 늘어난다는 건, 내 이름 때문에 일어나는 일의 결과들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뜻이야. 도장 찍고 만든 은행 통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은행 강도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사고가 아닌 이상에야 아빠가 책임져야 했지. 통장을 분실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통장 안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게 하는 것, 그게 아니라도 번번이 0이 돼서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손 벌리는 일 없도록 하는 것 등 아빠 이름의 도장을 찍는 순간 아빠의 책임은 크게 늘어나는 것이었지. 도장이라는 인증 수단이 소리소문 없이 그 수많은 책임의 문을 활짝 개방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군가 이걸 잘 풀어 설명해줬으면 좋았으련만, 굳이 나누자면 아둔한 편에 속하는 아빠는 ‘어른이다’라는 것에 신나 방방 뛰기만 했지 책임에 대해 잘 배우지 못했어. 어쩌면 아빠가 듣고 흘렸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아빠는 통장도 곧잘 잃어버리고, 돈도 관리 못해서 부모님 외식 한 번 시켜드리지 못했어. 도장만 찍으면 새로 통장 발급 받을 수 있었고, 카드도 원하는 대로 만들어 외상도 하고 할부도 할 수 있었으니, 그런 혜택들을 누리기에만 바빴지. 심지가 자라지 않는 어른. 도장만 가진 아이. 그게 아빠였어. 진정한 성년의식은 도장 함부로 찍은 것에 대한 대가를 여러 차례 치러가며, 아직도 다 풀리지 않는 후회들을 쌓아가며, 아픔 속에 이뤄졌지. 너희들도 배우겠지만 세상이 가족과 부족 단위로 뭉쳐 살던 시절에는 어마무시한 성년의식들이 거행됐었다고 해. 덩쿨 하나에 의지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걸 성공해야 한다거나, 맹수를 사냥해 와야 한다거나,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버텨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야. 어떤 건 전설의 형태로만 남아 있고, 어떤 건 나라에서 금지를 시켰고, 어떤 건 은밀히 행해진다고 하지. 요즘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런 것들을 위험하다고, 너무 위험해서 야만스럽다고 보고 있어. 그리고 케이크 하나 놓고 선물 주고받는 것으로 안전하고 평화롭게 서로의 자라남을 축하해 줘. 위험하고 아픈 것들을 빼놓고. 성년의식을 치르다 죽을 필요까지야 없겠지. 하지만 그 의식에서 아픔이라는 요소를 말끔히 거세했을 때 성년의식은 더 이상 성년의식이 아니라 여느 잔치에 불과한 것이 돼. 그 때에 겪지 않은 아픔이 나중에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져서 되돌아올 때 잔치의 시간들만 누린 심지는 매몰차게 부서진단다.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나오듯 성장은 언제나 아픔을 양분으로 삼지. 일생일대의 위험을 통과함으로써 심지에서부터 아이의 티를 벗겨내야 더 성년에 가까운 뭔가가 된다고 아빠는 생각해. 너희들도 서명을 갖고 싶다고? 펜 쥐고 이름 흘려 쓰는 법은 아빠에게 묻지 않아도 너희들은 터득할 수 있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 서명의 무게감을 버틸 만한 심지를 너희 안에 갖는 건 쉽지 않아. 미리 다져놓지 않으면 그 서명이 너희를 짓눌러 부러트릴 수도 있어. 그래서 서명보다 중요한 건 너희 안에 어른을 매일 1cm씩 키워내는 거야. 너희 손에서 서명이 완성될 즈음에는 너희가 그 무게를 두 발로 서서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해져야 해. 혹여 다른 방법의 인증이 너희 시대에 자리를 잡는다 하더라도, 아빠의 당부는 변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더 너희들에게 강조하고 싶어. 지금의 흐름상 너희의 지문이나 목소리, 홍채 같은 것들이 서명을 대신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거든. 혹은 몸에 심는 쌀알 같은 칩셋이 될 수도 있어. 서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멋진 손글씨를 연습하느라 수많은 종이를 버리지 않아도, 아빠에게 묻지 않아도, 어른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돼. 좋은 소식일까?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 너희들의 정체를 인증한다는 것의 그 막중한 무게감은 변하지 않거든. 어른들이 도장을 파줄 때까지 몇 년을 하염없이 기다린다거나, 서명이 충분히 멋있어질 때까지 연습하며 갖는 시간은 옛 세대들이 누리던 안전장치였어. 인증을 책임 있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자라야만 손에 쥐어지는 인증 수단이 정말 안전한 인증 수단이었던 것이지. 인증이라는 것에 수반되는 책임도 이해 못하면서 인증의 수단부터 갖게 되는 건 상당히 위험해. 그래서 너희들의 서명 가르쳐 달라는 말에 이리 길게도 잔소리를 늘어놓는구나. 너희들이 더 이상 서명을 연습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그 전에 너희의 심지가 성년의식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려면 아빠 엄마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출생 신고 할 때에 아빠가 서명을 했었구나. -7월 7일, 아빠가-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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