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안이 아빠를 만든다 10] 이-팔 전쟁과 효과 없는 보안에서 극단주의를 경계하기 | 2023.10.16 |
정보보안은 의외로 산 지식을 다루는 분야라, 그 안에서 발굴되고 전파되는 중요한 원리와 실천 사항들은 사이버 공간에서만 가치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실생활에서도 보안의 메시지들은 빛을 발합니다. 그것을 아빠의 관점에서 연재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되도록 2~3주에 한 번 24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집에 막내 늦둥이가 들어온 지 100일이 훨씬 넘었구나. 원래 첫 아이 때는 태어나고서 며칠이 지났는지, 몇 개월 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지만 둘째 때부터는 그러기가 쉽지 않아. 그러니 셋째 때는 오죽하겠니. 그래서 100일이 훨씬 넘었다는 것만 알지 정확한 계산을 하려면 잠시 앉아서 손가락을 꼽아보아야 겨우 근사치를 추정할 수 있는 게 지금 아빠의 상태야. 막내 이유식 처음 먹은 날부터 며칠이 지났는지까지 달력에 기입하는 첫째 너의 눈으로는 아빠만큼 무관심한 부모도 없겠다, 그치? ![]() [이미지 = gettyimagesbank] 그러고 보면 첫째 네가 하는 말과 행동들에서 가끔씩 첫 아이를 가진 부모의 모습들이 나오곤 하는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아빠를 놀라게 했던 것이 있는데, 네가 막내를 돌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할 때였어. “얘가 벌써 이렇게 커서 너무 아쉬워요.” 이제 막 목 가누는 아이에게 ‘이렇게 컸다’고 말하는 너의 시선과, 그것을 ‘아쉽다’고 느껴버리는 마음이 영락없이 너희 셋을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식들을 바라보는 세상 모든 엄마 아빠의 마음에는 ‘얼른 자라서 멋진 청년이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언제까지나 내 품 안에서 떠나지 않는 귀여운 아기였으면 좋겠다’는 상충된 바람이 공존하거든. 그것도 아주 조화롭게 말이야. 자식으로서 부모의 사랑을 생각할 때 뭉클할 때가 있지. 그런데 그건 대단히 막연한 거야. 진짜 부모가 되어봐야 비로소 이해되고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 중 하나가 너무나 깊은 사랑은 두 가지 면모를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내 자녀가 자라 나보다 크고 멋진 어른이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벅차고 즐거운데, 지금 아기의 모습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탄식 나올 정도로 아쉽다는 거야. 그런데 또 탄식으로 작별한 어제 하루를 까맣게 잊은 듯, 오늘 아기가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에 엄마 아빠는 자지러지게 웃으며 행복해 하지. 그러면서 이 아이가 자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될 거라는 희망 섞인 예언을 즐거이 주고 받다가, 밤이 되면 같이 아기 사진을 보면서 또 이 아이의 가장 예뻤던 하루가 갔다고 탄식하다 잠들지. 그 모지리 같은 쳇바퀴가 부모 마음인 걸,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첫째 넌 벌써부터 알아가고 있더라. 그것 뿐이겠니. 사랑은 포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너희들 키우면서 깨닫고 또 새롭게 익히는 게 부모의 매일이지. 너희가 하고 싶어하는 것들 다 들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다가 너희들이 제멋대로 자라는 걸 경계하지 않을 수 없어. 너희들의 부탁을 거절하고, 혼내고 벌을 줄 때, 누군가 인두를 지진 것 같이 마음이 쓰라리다는 걸 상상만으로는 다 공감하기 어려워. 부드러움과 단호함. 따듯함과 냉정함. 단기성과 장기성. 이런 상충된 것들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건 너희들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되었단다. 이런 사랑의 동시성을 알고 실제로 체득하여 발휘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 중 하나란다. 그러다 보니 참 많은 것들이 양면을 고루 가지고 있더라. 새로운 발견은 아니야. 이미 교과서나 사전에는 다 나와 있는 건데 우리가 한쪽만 보고 사는 거지. 예를 들어 자유라는 것 말이야, 자기의 뜻과 소원을 마음껏 펼치는 것이기는 한데, 거기에는 책임이라는 것이 뒤따라. 통제 없이 놓아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 막중한 통제 장치가 존재하는 것이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통제의 부분을 못 본척 하며 자유를 언급할 때가 많단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 오래 전부터 정립된 개념인데도 말이야. 보기 싫은 거, 인정하기 싫은 걸 못 본척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긴 하지. 아빠가 일하고 있는 ‘보안’이라는 분야도 마찬가지야. ‘보안’은 안전의 또 다른 이름으로 통용되는데, 거기에는 ‘불편함’이라는 요소가 숨어 있다는 걸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지. 오로지 ‘안전’만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단어를 사용한단다. 그러니 내가 무슨 행동을 어떻게 했든 안전할 수 있어야 보안이 제대로 기능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용자의 책임을 언급하는 보안 전문가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자기 일 제대로 못하고 사용자 핑계댄다고들 여기는 거야. 안전하려면 어느 정도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이들이 ‘편리하기 만한 안전’을 ‘보안’과 동의어로 받아들이고 있구나. 심지어 몇몇 보안 전문가들도. 요즘 동네 형들과 누나들이 수근거리는 것 때문인지, 아빠가 매일 커다란 화면에 신문 기사들을 띄어놓고 있는 걸 너희들이 오며 가며 봐서 그런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터진 전쟁 이야기에 너희들도 관심이 많은가 보다. 아빠한테 매일 전쟁 상황을 물어보니 말이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극단주의’ 혹은 ‘극단적’이라는 말과 여러 번 맞닥트리게 될 텐데, 아직 거기까지 묻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너희의 관심이 상황의 살갗 밑으로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야. 극단주의는 한끝으로만 쏠려 있는 생각이나 사상을 말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자 극단적이라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지. 그런데 말야,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극단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건 잘 이야기 하지 않아. 너희들 눈에는 아직 잘 안 보이겠지만, 예를 들어, 소비자로서 권리만 내세우면서 이른 바 ‘진상’이 되어가는 사람도 많고, 특정 사상에 매몰돼 모든 것을 그쪽으로만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사회 운동가들이나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들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많아. 도무지 타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야. 여러 나라에서 몇 년 전부터 우려되는 현상 중 하나가 ‘사회 양극화’이고, 그러면서 극단적인 보수 층이 진보의 본거지와 같았던 유럽과 같은 지역에서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진보 층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어느 덧 세계가 점점 이전 냉전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 편지에 풀어서 너희들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기에는 조금 버겁구나. 아무튼 ‘극단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중동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현상이라는 것만은 알아두면 좋을 거야. 극단으로 치닫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나, 저 먼 나라 독일에서 극우 층이 선거에서 이긴 것과, 지금 우리나라 어느 백화점에서 갑질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 하나로 묶여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지. 아빠는 이것이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가진 좋은 단어들, 특히 양극에 있는 것들을 균형 있게 담아내고 있던 본래 뜻을 한 가지로만 규정하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보고 있어. 이를 테면 아빠가 위에서 말했던 ‘사랑’ 같은 거지. 아기가 자라도록 온 삶을 투자해 도우면서도 정작 그 성장이 아쉽기도 한 것이 부모의 자연스러운 사랑인데, ‘아기가 또 자라버렸네’라고 아쉬워하는 걸 갑자기 입에 담지 못할 말이라고 규정하면 어떻게 되겠니? 사랑은 엄하기도 하고 용납하는 것이기도 한데, 엄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서 금기시 되어가고 용납만 살아남고 있지. 이런 흐름 속에서 ‘아이 성장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부모로서 못할 짓’이라는 육아 이론이 어느 날 등장한다고 해도 아빠는 별로 놀랄 거 같지 않구나. 자유? 이건 한쪽으로만 사용되어 온 역사가 너무 깊어서 애써 찾을 필요도 없단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노랫말이나 소설, 영화들이 찬양하는 자유로움은 온전한 뜻을 갖지 않을 때가 너무 많아서 세는 것조차 힘들어. 또 뭐가 있을까? 보안. 안전하려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 보안에 그 많은 돈을 투자해도 우리는 매년 더 많은 것을 해커들에게 잃고 있기도 해. 그런데도 아직 ‘편리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들이 연구되고 있지. 각종 신기술들이 등장할 때마다 ‘보안을 더 편리하게 해 준다’는 캐치프레이즈가 같이 나오는데, 사실 효과까지 증명한 사례는 전무하단다. 단어들의 본 뜻이 가진 균형성을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거세한 채로 우리는 단어들을 익히고 말하고 후대에 전파하고 있지. 동시성이나 양면성, 균형감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한쪽 끝으로 기울어진 것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어. 우리의 말이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생활이 온전할 수가 없지. 그래서 세상은 점점 양극화 되어가고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싸우지만, 중국과 미국도 싸우고, 세상은 이러한 싸움들에서 한쪽 편 들기를 강요받고 있고,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의 세계관은 ‘아군 아니면 적군’으로 좁혀져 있지. 아마 너희들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물들지도 몰라. 그게 아빠의 걱정이란다. 그래서 막내가 우리 집에 온 것이 아빠에게는 커다란 선물이야. 너희가 이 아가를 통해 사랑이 가진 그 아름다운 상충성을 배울 수 있다면,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너희는 남다른 무기를 가진 사람이 될 거야. 그 무기를 가졌을 때, 너희 스스로가 세상이 알려주는 단어들을 하나씩 의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 단어의 뿌리까지 탐구하고 올라가, 양 극단을 균형 있게 끌어안는 넉넉함에 이를 수 있게 되기를 아빠로서 바라고 또 바란다. 우리의 말이 극성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 때에, ‘얘가 너무 빨리 커서 아쉬워요’라는 사랑의 표현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초등학생인 너는 아빠 바람의 성취였다. 그래서 고맙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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