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유출 사건
과거 산업정보유출은 국내외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는 그들의 정보가 중소기업의 정보보다 값어치가
높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공식이 반드시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더군다나 대기업과는 달리 보안체계 또한 허술해 상대적으로 산업스파이가 활동하기 쉬운 곳이 바로 중소기업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과 같은 국내 유망기술은 중소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물론 몇몇 대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소기업들도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갖추고 ‘Made In Korea’의 위상을 떨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반도체 산업은 최근 산업스파이들의 집중 표적이 되고 있다. 과거 중국 등의 기술수집 대상이 휴대폰과 전자제품, 그리고 자동차 등 대기업의 최첨단 기술 분야에 국한되던 모습에서 벗어나 좀더 광범위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밋빛 미래
반도체 회사인 A사는 그야말로 신바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비메모리 반도체기술이 해외시장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해외지사도 설립되는 등 크고 작은 경사가 이어졌다.
박유출(가명·45세)은 바로 그런 A사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인물이다. 회사 초창기부터 어려움을 함께 했었기 때문에 A사의 대표이사는 물론 사내 경영진들과도 사적인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A사의 성장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자신이 A사를 성장시킨 듯한 성취감을 느끼는 등 이는 박유출에게도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물론 A사도 박유출에게 섭섭지 않은 보답(?)을 해줬다. 해외지사가 늘어나는 바람에 믿고 맡길 만한 직원을 선발해 지사장이라는 직책으로 해외파견을 보냈는데, 그 중에 박유출도 포함됐던 것이다.
박유출이 맡은 직책은 홍콩지사장. 중소기업인 A사의 성공은 이렇듯 박유출에게도 ‘인생성공’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배신
“그만 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A사 대표이사인 김태영(가명·55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니 왜? 홍콩 쪽 업무가 힘든가? 그럼 다른 쪽으로 옮겨줄까? 아니면 다시 국내로 복귀할 텐가?”
“힘든 것은 아닙니다. 그냥 다른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얼버무리는 박유출 지사장에게 김 대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가족같이 생각했었는데, 아쉽게 됐네. 내 어쩐 일로 그만두는지는 묻지 않겠네. 다만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는 항상 비워둠세.”
A사의 문을 열고나서는 박유출의 가슴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이곳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던 동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니야, 이런 감정 따위 느낄 시간 없어. 난 좀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잠시 웅크리는 것 뿐이야.”
A사에서 멀어져 가는 박유출은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험한 제의
사실 홍콩에서의 지사장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연봉은 둘째치더라도 해외바이어들과의 만남과 색다른 곳에서의 생활, 그리고 홍콩지사 내에서의 지사장이라는 위치는 국내 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심경에 변화를 느낀 것은 단순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중국의 C사와 D사가 제의를 해왔는데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한국 A사의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지사장정도의 직책이라면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믿소.”
즉, C사가 모든 자금을 지원해줄 테니 박유출 지사장이 한국 A사의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유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유출된 기술은 C사가 아닌 D사의 이름으로 제품이 생산되기 때문에 절대 발각될 리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이에 따른 사례는 엄청난 것이었고, 평생 벌어도 만지지 못할 금액이 제시됐다.
박 지사장은 그런 제의를 받는 순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지만, 결국 마음이 흔들려 기술유출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완전범죄?
박 지사장이 기술을 유출하기로 마음먹자, 상황은 급속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A사를 퇴직하는 것부터 시작해, A사 개발이사 황일권(가명·35세)을 설득,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계획에 참여토록 했다.
또한, 박유출은 자신과 황일권이 유출한 기술을 자체개발 기술로 위장하기 위해 현직 대학교수들의 지원을 받아 B사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완벽한 유출경로가 확보된 셈이었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자 최초 제의를 해왔던 중국의 C사와 D사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그들의 애초 약속대로 C사가 제품을 개발하는 자금을 지원하고, D사가 생산을 하기 위한 준비작업이 착착 진행된 것이다. 한마디로 국제적이면서도 조직적인 기술유출 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완벽할 것만 같았던 이들의 범죄행각은 다행스럽게도 첫 제품이 생산되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국정원의 산업기밀보호센터에서 국내외 정보망을 통해 첨단기술 보호활동을 강화하던 중 이와 같은 정보유출 시도가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 현장을 지키고 있던 수사관들에 의해 발각된 것이다.
이번 사건은 A사의 박유출 지사장과 황일권 개발이사 등 고위 임원과 기술고문과 사외이사인 대학교수까지 기술유출에 적극 가담했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특히,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의 경우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제품이나 기술이 유출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피해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물질만능주의와 도덕적 해이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으로 씁쓸함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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