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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듣고 싶지 않은 말 두 가지 2017.06.09

“이제부터 트렌드 강연 해줄 테니 잘 들어, 파이팅!”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말을 배우는 자녀를 두고 있어서 그런지 ‘그게 무슨 뜻이야?’라는 질문이 항상 귓가를 맴돈다. 그래서 단어 하나 사용할 때마다 이건 이런 뜻, 저건 저런 뜻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풀이해보기도 한다. 어느 날은 누군가가 하는 ‘파이팅’이란 말을 들었는데, 그 ‘풀이 습관’이 발동했다. 파이팅의 속뜻은 아마도 ‘그래, 네가 고민하는 건 알겠지만, 딱히 나라고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경이 진심으로 쓰이는 것도 아냐. 피차에 시간 낭비 말고 여기서 좋게 좋게 대화 끊자’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미지 = iclickart]


그러고 보니 ‘파이팅’을 남발하는 사람치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 드물다. 특히 여기에 빈 웃음까지 능수능란하게 곁들이는 사람은 십중팔구 ‘영혼 없는’ 대화에 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파이팅과 빈 웃음 콤보 이후 자리를 먼저 뜨기까지 하면 백발백중이다. 평소 파이팅 소리가 입에 붙어 있거나 귀에 붙은 사람은 그 자리에 물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껍질일 뿐이다. 먼 훗날 강력한 존재가 지구를 정복하고 한국 사람이라는 존재를 탐구할 때, 허물벗기라는 방어기제를 발동시킬 때 ‘파이팅’이라는 소리를 낸다고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보안 업계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바로 “업계 (위협, 보안, 공격, 사이버, 글로벌 등) 트렌드”다. 여러 업체와 기관들이 행사를 열고, 전문가들이 초빙돼 강연을 하고, 칼럼을 남길 때 제목을 잘 보라. “업계 트렌드”라는 표현이 있거나 냄새를 풍긴다면, 믿고 거르면 된다. 그 사람의 강연이나 칼럼에는 화자의 껍질만이 있을 뿐, 실속은 없을 확률이 매우 높다. 실속이 없다기 보다 보안 종사자들이 이미 다 알고 있을 내용을 장황하게 풀어놓는 것 이상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반대로 당신이 전문가인데 누군가 섭외 전화를 해서 칼럼이나 강연을 요청했을 때, “업계 트렌드에 대해 간단히 짚어주세요”라고 한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당신의 콘텐츠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당신 얼굴이나 이름값, 혹은 당신이 소속된 단체의 이름이 더 필요한 것이다. 그게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콘텐츠로서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 기분 좋은 요청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퇴사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요청은 없어질 거라는 뜻이니까.

기자로서도 행사 주제가 ‘글로벌 트렌드’ 정도로 잡히는 것 역시 썩 유쾌하지 않다. GDPR이라든지 블록체인, 인공지능 등과 같이 최근 뜨거운 키워드조차 없다면, 안내 메일을 여는 순간 “그냥 우리 회사 이름만 검색 포탈에 몇 번 노출만 되면 끝이지, 기자인 너희들의 콘텐츠에는 별 관심 없어”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파이팅이나 트렌드 강연이 전혀 무의미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위로나 북돋음을 처음 받아보는 사람들에겐 파이팅이란 말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 저기 들은 건 많은데 그 소식들을 하나로 꿰뚫어보지 못한 사람에겐 트렌드 강연이 나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파이팅’과 ‘업계 트렌드’는 반복될수록 그 가치가 급감하는 게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둘은 잘해봐야 1회성 조커카드일 뿐이다. 조커카드는 조커카드라고 표면에 드러나 있기라도 하지, ‘파이팅’과 ‘업계 트렌드’는 표면이 번지르르해서 쓰는 사람도 이게 조커카드인 걸 모르고 남발해 어느 덧 껍질만 있는 인간으로 순리처럼 변해간다. 그리고는 나이 들어 이게 인간이야, 이게 사회야, 이게 살아가는 법이야,라는 합리화를 하는 것이 순서다. 이 지겨운 나이 듦의 고리가 다 ‘파이팅’ 때문이다. 할 말이 없을 때, 할 강연이 없을 때 솔직해지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보안의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아직 깊지 않다. ‘공포 분위기 조성만으로는 안 된다’, ‘경제적인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등의 주장들이 그나마 자주 나오는 편인데, 아직은 그 선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보안 업계 성장’을 위한, 즉 ‘우리가 더 잘 먹고 잘 살려면’이 전제되어 있는 고민이라 보안 바깥의 사람들에겐 설득력도 없고 공감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안 전문가들이 콘텐츠 전문가들은 아니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하긴, 그러니 어렵사리 행사까지 으리으리하게 열고는 기껏 정체불명의 트렌드 강연들이나 하는 거겠지만.

‘파이팅’ 한 번 가볍게 읊어주는 대신 입 다물고 어깨 한 번 두드려주는 게 낫다. 적어도 ‘나에겐 직접적인 해결 능력이 없어’를 정직하게 서로에게 인정하는 것이니까. 마찬가지로 ‘트렌드 강연’ 하느니 그냥 대놓고 제품 소개를 하는 게 낫다. 적어도 시장 진출을 향한 진심을 느낄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 모습이 당장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가 해결 능력 없는 사람이란 걸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 회사가 제품 설명밖에는 할 말이 없는 기업이라는 걸 내비치는 꼴이 되더라도, 스스로에게 속지 않는 게 중요하다. 스스로를 속여 버릇하면, 했던 말만 또 하는, 콘텐츠 없는 노년만 예비 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지난 몇 년 동안 ‘사용자들이 너무 게을러’라고 말하는 보안 업계가, 사용자들의 잠을 깨우는 계몽가로 보일까, 세월과 함께 잔소리만 늘어난 어르신으로 보일까? 진심을 담을 수 없어 업계 전체가 스스로 노화를 재촉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우리 아직 젊은 분야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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