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안다반사] 카불 테러와 보스턴 테러 피해자의 ‘스트롱거’ | 2018.01.29 |
끊임없이 이어지는 테러 사건과, 그것을 다룬 작품들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주말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앰뷸런스로 위장한 테러리스트의 차량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사망자만 100명을 훌쩍 넘겼다. 원래 사망자들이 많이 생겨나는 게 테러 사건이긴 하지만, 단일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명이라는 건 지나치게 높은 숫자다. 아프가니스탄은 이 날을 국가 애도일로 정했다. ![]() [이미지 = iclickart] 카불에서는 불과 1주일 전에도 테러 사건이 일어났었다. 한 대형 호텔에서 발생한 건데 투숙객에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스무 명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에 정말 무력한 것일까. 아니면 미국의 주장대로 옆 나라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제대로 축출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인 걸까. 무시무시한 폭력 사태로 온 대륙이 피를 흘리는 곳이 또 있으니(사실상 모든 대륙이 그렇긴 하지만) 바로 남미다. 마약을 밀매하는 대형 갱단이 판을 치고 있고, 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법천지다. 멕시코에서는 작년 한 해만 2만 5천 건이 넘는 살해 사건이 있었고, 이제 1월인데 올해만 25명이 살해당했을 정도다. 이에 다음 대선에서는 ‘안전과 치안’이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선거를 이유로라도 군과 경찰 병력의 대거 투입 등 본격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어 보인다. 하필 그런 보도들이 나오던 주말에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을 주제로 한 책 스트롱거(Stronger)를 접하게 됐다. 그날의 사고로 멀쩡한 두 다리를 잃은 실존 인물, 제프 보우먼(Jeff Bauman)이 직접 쓴 자서전이다. ‘몇 명이 사망했다’라고 끝나는 신문지상의 테러 보도를 넘어, 그 이후 피해자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그 주변 인물의 반응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사이 그는, 주변인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의식을 되찾고 제일 먼저 테러범에 대한 인상착의를 제보했고, 그래서 테러범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전 국가적인 영웅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영웅 이미지’는 과도하게 소비된다. 그의 주변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모시며,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탈출구를 찾는다. 먹칠 된 대국의 위상 역시 그가 영웅으로 우뚝 섬으로써 치유 받는다. 두 다리를 잃고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할 그 자신도 이리 저리 휘둘리며, 두 다리를 잃었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더 큰 혼란에 휩싸인다. 슬픔과 죄책감에 대한 임기응변식 해결책은 그들 모두를 공허한 술독과 신경과민에 빠지게 했다. 그 사건이 매개가 되어 헤어졌던 여자 친구와 결혼도 하지만, 3년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과 사고는 늘 우리 곁에 있다. 굳이 제프 보우먼이나 아프가니스탄을 들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말에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해 일이 평상시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아침에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두고 출근을 하면 하루 스케줄이 뒤엉키기도 한다. 내가 걷는 보도 블록에 차량이 뛰어들지 말라는 법이 없고, 무심코 물어뜯은 손톱에 생살이 같이 뜯겨 나와 퉁퉁 붓는 바람에 평소 타자 실력의 60%밖에 발휘하지 못할 때도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을 때 우리는 임기응변을 발휘한다. 혹은 재치라고도 한다.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잘 되건 안 되건, 임기응변이란 게 갑자기 신의 계시처럼 하늘에서 아무런 맥락 없이 뚝 떨어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 재치란 것도 평소에 쌓아둔 것들에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날카로운 말로 하루 종일 가슴 답답하게 만들었다면, ‘당한 만큼 갚아준다’라는 생각으로 살던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맞받아치면서 상대 마음에도 ‘정당방위’ 생채기를 낸다. 실제로 어떤 말싸움 잘 하는 후배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늘 싸울거리를 적어놓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침에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두고 회사로 가는 아빠는 아내를 평소 깊이 신뢰하거나, 애들 아픈 거 병원가면 다 낫기 마련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금방 포기하는 경험이 쌓여온 사람일 수도 있다. 차가 갑자기 뛰어들 때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운 좋게 그 순간에 뛰고 있던 사람일 수도 있지만 평소 반사 신경을 단련시켜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손이 아파 타자가 평소보다 느려져도 마감이 목숨보다 중요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해낸다. 결국 평소의 생각과 사고방식, 혹은 지켜오던 규칙이 순간의 결정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당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매우 둔감하면서 현실 부정에 능숙하거나, 평소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려 행동지침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각자의 그런 방식이 삶의 규칙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렵거나 공격성 넘치는 질문들로 찔러보면 구분이 가능하다. 상황 모면만을 위한 임기응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질문 몇 번 답하다가 자기모순에 당착한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내 감정/입장을 존중해 줘’가 나온다. 이럴 땐 이래서 다른 것이고, 저럴 땐 저래서 다른 것이라는,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변명에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반대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정한 ‘누구나 동의할 만한’ 규칙을 지켜온 사람이라면 일관적인 답을 낸다. 고집이 느껴질지언정 ‘지 편할 대로 말하고 본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반드시 실패하고, 후자는 문제를 해결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평소 어떤 규칙을 어떤 태도로 지켜왔느냐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큰 힘을 발휘한다. 다시 말하면, 평소 지켜왔던 규칙에 근거하지 않은 해결책은 임시방편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내가 유독 고집스럽게 지키는 규칙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 정체성으로부터 나온 답이 가장 내가 나답게, 편안히 유지할 수 있는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에 봉착해보면 느끼지만, 흔히 말하는 ‘유연성’은 오히려 나를 가장 얽매이게 할 것 같은 ‘규칙 지키기’로부터 나온다. 누구나 규칙 아래 산다. 자기만의 나라를 건립하여 사는 사람이라도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법 없이 살만한 사람들이라면 보통 자신만의 규칙을 정하여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며 산다. 규칙이나 규정은 누군가 혹은 뭔가를 옥죄는 느낌이지만,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미련하게라도 뭔가를 잘 지켜내 본 사람들이 내면의 자유로움을 누릴 때를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목격한다. 예를 들면, 숙제나 할 일과 같은 ‘규칙’을 지킨 후에 놀기 시작하는 사람. 이들은 먼저 놀기부터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기 시간을 즐기더라. 보안은, 사건이 터지지 않은 평상시 ‘규칙’투성이의 분야다. 새로운 공격 기술과 범죄 전략이 등장하긴 해도, 보안 규칙이 새롭게 등장하는 법은 거의 없다. 해야 할 일이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지만 명백하다는 것이다. 테러 근절에 대한 정답이 ‘규칙 지키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이버 테러(공격)’에 대한 답은 보안 규칙 지키기일 수밖에 없다. 평소 지킨 보안의 규칙들이 실제 사고 발생 시 대처도 빠르게 만든다는 건 많은 보안 전문가들이 여러 글들을 통해 증언하는 바다. 일반인들의 보안 인식 제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고민을 하지만, 딱히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규칙’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유연함의 든든한 근거’로 전환시키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물론 그것도 너무나 어려운 사고방식의 변환이기도 하다. 꼰대 같은 소리지만, 나이가 좀 들어야 깨달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X세대라고 하는 30대 후반~50대 초반이, 기술에 능숙한 10대와 20대보다 보안 감각이 더 뛰어나다는 연구 조사가 서구권에서부터 매년 나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Boys, be ambitious”가 아니라 “Boys, be rule-abiding”로 변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걸까.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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