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수첩] <내가 죽던 날>, 가장 생생히 살아있으리라 | 2021.08.11 |
죽음이 생명의 공급원이 되는 순간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 속에서 공포 마케팅이라는 자기비하에 갇힌 보안의 일부 프레임을 보았다.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생명과 가장 가까운 건 죽음이다. 굳이 사람이 돌보지 않아도 산천의 생명들은 각자의 죽음을 통해 대를 잇는다. 사람들에게도 살아있다는 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죽음의 손길들을 감사히 피해왔다는 뜻이다. 특히, 전 세계적인 전염병처럼 죽음이 자기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지금과 같은 때에는 더 그렇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수많은 종교와 성찰을 낳았고, 알든 모르든 그것들이 양분 되어 우리는 사고하고, 또 살아간다. ![]() [이미지 = 네이버 영화] 그래서일까. 이 세상의 80억 인구가 이견 하나 없이 동의할 사실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반박할 수 없는 진리로서 죽음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그 움직일 수 없는 공통의 사실 위에서 - 물론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지만 - 생명을 영위한다는 건 사방이 적인 냥 반목하고 싸우기에 바쁜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당신과 나는 어찌됐든 한 가지 사실에는 동의하니까. 스릴러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죽음 가까이에까지 가본 것 외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세 타인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출생지나 연령, 배경, 그 어느 것 하나 같을 것 없는 이 세 주인공은 오로지 죽음만을 매개로 삼아 얽히게 되고, 서로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통해 다시 생명을 찾게 된다(상세한 설명을 쓰고 싶지만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 상을 올해만이 아니라 10년 연속 준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이 영화를 몇 줄로 요약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그만 둔다). ![]() [이미지 = 네이버 영화] 누군가가 창작한 영화 속 상황이 아니더라도 죽음과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 법의학자나 검시관 등이 대표적이다. 강력 범죄를 현장에서 다루시는 분들도 대부분 그렇다. 이들은 생명력을 예찬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방송에 나와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사건인지를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인들의 안전과 생명 보존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죽음이 삶의 양분이 되는 순간들이다.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장마 기간의 먹구름을 뚫고 강하하는 광선처럼 살아 있는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느낌이 일상이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뇌피질을 뚫고 들어올 때가 있다. 진짜와 똑같은 꿈속에서 가족을 잃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허둥지둥 전화기를 찾거나,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어두운 방 한 구석을 초조하게 응시할 때가 있다.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 생명을 발견해 냈을 때의 그 안도감과 고마움은 일순간이라 할지라도 생명과 관련된 여러 가지 가치들 - 예를 들어 사랑이라든지 - 에 힘을 더한다. 맥락 없는 안부 전화와 메시지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탄생한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생명의 영양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건 아니다. 한 번 맛봤다고 해서 언제나 다시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 마냥 타인의 것이기만 하면 좋겠는 때,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감정들에 매몰될 때, 죽음을 한 번도 가까이에서 느끼지 못했을 때, 양분은 양변기 속 내용물처럼 소음만 일으키고 사라진다. 두려운 것을 직시하기 어렵고, 감정 제어 연습을 안 해봤고, 경험이 부족할 때로 정리할 수 있다. 죽음만큼 진하지도, 보편적인 컨센서스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보안 업계 역시 매일 같이 발생하는 해킹 사고와 취약점 발견을 통해 누군가의 고통과 위기를 지속적으로 마주한다. ‘해킹을 당하거나 안 당할지 모르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당한다’라는 오랜 전제 역시 ‘누구나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해킹 사고에 따라 조직이나 담당부서, 혹은 담당자가 아예 없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으니 그것 역시 죽음의 작은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해킹 혹은 죽음이라는 필연적 사실을 불편해한다는 것조차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보안 업계의 우리들은 이런 ‘유사 죽음’들을 충분히 누리고 있을까. 유사 죽음을 먼저 접해본 보안 전문가들은, ‘해킹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전제가 점점 일반인들까지도 전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몇 안 되는 사실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죽음이 주는 생명의 유익함을 충분히 공유하고 있을까. 책을 쓰고 TV에 나오는 검시관이나 의사들처럼 먼저 경험해본 자의 책임을 다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재미있게도 사이버 보안 전문가들은 의사에 종종 비유되기도 한다). 가끔 보안 업계가 지나치게 공포심을 조장한다거나 심지어 공포 하나로 먹고사는 분야라는 자기비하의 의견이 ‘포르노’라는 원색적인 단어까지 대동해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그런 의견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죽음이 불편한 주제라고 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죽음을 알림으로써 생명력이 파급되는 것인데, 단지 그 불편함 때문에 죽음도 생명도 아닌 상태를 답보하는 게 맞는 것인가? 불편이 죽음보다 무서운가? 보안 업계는 사건사고를 통해 공포심을 팔아치우는 게 아니다. 죽음과 여러 모로 비슷한 사건을 가지고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사고 사례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당신은 무사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중이다. 보안 전문가가 불편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불편한 걸 조금도 참을 줄 모르는 귀가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 보안의 마땅한 선택지는 그런 굳은 귀를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경로로 파고들어 가장 생명력 넘치는 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러니 위험을 말할 때, 상대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공포 마케팅’이라고 손가락질 할 때 당당해도 된다. 당신은 오늘 생명을 심었다. 죽음을 제목으로 한 영화가 생명을 그려낸 것처럼 말이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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